전공의 여전히 병원 밖…일부 교수단체도 맞대응
총리 “전공의들 복귀해서 정부 감시해달라” 요청
“복귀 안 해도 지속 가능한 의료 체계 답 내놔야”
행정부, 입법부에 이어 사법부에서도 사실상 의대 증원에 손을 들어주면서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정책은 더욱 힘을 받게 됐다. 단, 대치 중인 전공의 복귀를 포함한 의료계 설득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서울고법 행정7부(부장판사 구회근)는 지난 16일 전공의, 수험생, 의대생 등이 보건복지부와 교육부를 상대로 낸 의대 증원 취소소송의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필수의료·지역의료가 상당히 어렵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의대 정원 증원 필요성 자체는 부정하기 어려운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또 일부 미비하거나 부적절한 상황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현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를 위해 일정 수준의 연구와 조사, 논의를 지속 왔고 만일 증원 규모가 다소 과하다면 향후 얼마든지 조정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점도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우리나라 '삼권'을 구성하고 있는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 모두 사실상 의대 정원 2000명 확대에 힘을 실어주게 됐다.
행정부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추진 중이며, 윤석열 대통령은 의료 공백 상황 속에서 치러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총선)에서 여당이 사실상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입법부에서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 4월 윤 대통령과 가진 영수회담에서 의료개혁 필요성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대 증원의 경우 지금의 야당이 여당 시절이었던 문재인 정부에서도 추진했던 정책이다.
앞서 1심인 서울행정법원은 원고들이 모두 직접적 이해당사자가 아니라며 신청인 적격이 없다고 보고 '각하' 결정을 내렸다.
항고심(2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은 이번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의대 증원 절차를 당분간 중단하고 정부로부터 관련 2000명이라는 규모가 결정된 근거 자료 제출을 요구했고, 이 같은 과정을 거쳐 결과적으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
김재현 무상의료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정부는 이번 판결로 정책을 추진하는 동력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계는 즉시 재항고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대법원에서도 의료계를 향한 손을 들어줄 가능성은 적다는 의견이 많다.
신현호 법무법인 해울 변호사는 "지금 원고들이 의대생, 전공의, 학부모인데 이들은 현재 의대 2000명을 증원한다고 해서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기 때문에 각하 처분이 되는 게 맞다"며 "대법원으로 가더라도 결국 각하 처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여전히 진료 현장을 떠나 있는 전공의 복귀를 포함한 의료계 설득은 과제로 남아있다.
지난 9일 기준 레지던트 9997명 중 출근을 하고 있는 레지던트는 6%인 595명으로, 나머지 94%가 여전히 의료 현장을 이탈한 상태다. 교수들 역시 장기화된 전공의 이탈에 따른 물리적 한계 등으로 정기적 휴진을 추진하고 있다.
전국의과대학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15일 임시총회를 열고 법원에서 '인용' 결정을 하면 진료 정상화 방안을 모색하겠지만 '각하·기각' 결정이 나오면 사실상 근무시간을 줄이는 근무 시간 재조정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송기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보건의료위원장은 "(이번 판결에) 의사들 수긍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의대 증원 현실화가 사실상 정해진 만큼 이탈한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어떤 전략을 펼칠지도 정해야 한다.
정부는 진료개시명령을 위반한 전공의를 대상으로 의사 면허정지 행정처분 절차를 진행 중이었는데, 당정 협의에 따라 전공의 대상 '유연한 처분'의 일환으로 지난 3월20일, 7088명 이후 신규로 행정처분 사전통지서를 발송한 사례는 없다. 이미 사전통지를 받은 7088명 중에서도 실제 면허정지 처분 통지서를 발송한 사례도 없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간 미뤄온 전공의 대상 처분을 재개하거나, 이들을 복귀시키기 위한 또 다른 유인책을 제시하는 등의 움직임이 필요해 보인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법원 판단 이후 대국민 담화를 통해 "전공의들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필수 의료를 전공하겠다고 병원에서 수련 받고 계신 분들이 대부분이다"며 "이 분들은 우리 의료계와 국가의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공의들에 대해 법적인 처분을 유예하면서 복귀를 기다리는 상황"이라며 "빨리 (병원에) 복귀해서 환자를 치료해 주고 본인들의 의료적인 학문이나 의료 기술도 완벽하게 수련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전공의들이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진정성을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다"며 "전공의들이 복귀를 해서 우리를 감시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요청했다. 또 "이번이야말로 의료계를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선진화 할 수 있는 계기"라며 "그렇게 추진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전공의 달래기에 나섯다.
일각에서는 증원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이 제거되면 전공의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 교수는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게 돼 있는데 지금은 불확실한 게 많아 돌아오지 않는 상태"라며 "내년 증원이 되거나 안 되거나 둘 다 불확실성이 제거된다면 복귀를 하게 될 명분은 잡히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 결과와 별개로 의대 증원을 차질 없이 추진하기 위해선 '의료대란'을 해소할 구체적인 방안을 정부가 내놔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합리적 개혁 방향이나 의료 구조조정 방향을 더 구체적으로 내서 합리적인 의사들은 돌아오게 하고, 다른 의사들은 안 돌아오더라도 지속 가능한 의료 체계에 대한 해답을 정부가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그간 진료 전달체계를 민간에 맡겨왔는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가 나서서 흐름을 파악하고 있어서 상급종합병원은 중증 환자 위주로 가고, 급박하지 않은 환자는 지역 종합병원이나 전문병원으로 이송·회송하는 시스템을 잘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