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항은 6.25 전쟁당시 수많은 작전과 전투를 통해 대한민국을 지켜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역사를 지닌 애국 충절의 도시입니다. 포항에는 6.25 관련 충혼시설물이 약 27개 정도 됩니다.
하지만 몇 가지 충혼 조형물들은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담아낼 만큼 정성을 들였는지 의문이 듭니다. 일례로, 일본 제국주의 유물에 덧칠한 현충비로서 송도해수욕장 입구의 포항지구 전투 전적비와 미해병제1비행단 전몰용사 충령비입니다.
포항지구 전투전적비는 일제 강점기 나카다니 다케사부로 수상에 사용된 기단이며 미해병제1비행단 전몰용사 충령비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 충혼비였던 것을 그대로 재활용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기념물은 그 시절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까지 안고 가야 하기에 일제 잔존 유물을 사용했다면 제대로된 안내와 설명이 시민들에게 필요하다고 여기고 보완을 주문합니다.
그리고 포항전쟁사에서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낙동강 방어선 동부전선에 배치된 국군 제3사단 제25연대입니다. 제25연대는 7월 중순경 병력 보충을 위해 신규 편성된 연대로서 포항고, 동지고, 해양과학고 등 약 6~700명의 포항 출신 학도병들이 편성에 포함된 부대입니다.
이들은 중대 대대 단위로 편성됨과 동시에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채 포항을 사수하는 안강 기계 전투, 천마산 전투, 소티재 전투 등에 순차적으로 투입되어 편성 후 1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무명용사로 산화하였습니다.
특히 우창동 소티재 전투는 서울 경기 지역 출신 71명 학도병들이 중심이 된 포항여중 전투 전에 8월 9일부터 11일 03시까지 소티재에서 격렬한 백병전까지 치른 끝에 180명 중 160명이 전사하고 15명만 남긴채 모두 전멸하였습니다.
이제는 포항시에서 제3사단 25연대 포항 학도병들에 대한 새로운 조사와 평가를 주문드립니다. 현충시설 비문은 바로 역사이기 때문에 내용도 잘 써야 하고 오자 하나 용납하지 않는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포항여중 전투에 참여한 이우근 학도병의 나이와 학년 등이 실제와 다르게 소개되어 있으며 심지어 편지글 조차 전국적으로 장소에 따라 다르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우근 학도병의 나이와 학년은 족보 및 동성 중학교 동기생의 증언으로 손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편지글 또한 김만규 저서의 ‘학도병아 잘 싸웠다 ’에서 최초로 언급한 경위와 아직 생존에 계시는 유가족의 증언 및 제철고 손삼호 교사의 이우근 관련 자료 등을 통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포항시는 포항여중 전투에서 산화한 이우근 학도병의 실제 나이와 편지글의 올바른 복원에 책임감을 가지고 명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포항에는 용흥동과 기계면에 호국 문화의 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곳에 호국문화의 길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인천 상륙작전의 롤 모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런던, 뉴욕 등의 외국 언론에서조차 대서 특필된 중앙동 포항상륙작전. 포항상륙작전은 미 제1기병사단이 21척의 LST 선박에 3,000명 정도의 미군 병력과 군수물자를 싣고 포항 학산 방파제, 현재의 포항 여객선 터미널에 상륙하였습니다.
또한 학도병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던 우창동 소티재 전투, 중앙동 포항여중 전투. 고지를 16번이나 뺏고 뺏긴 양덕동 천마산 삿갓봉 전투. 환여동 송골 해변에 모여든 민간인 1,000여명을 인민군으로 오판, 수백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환여동 송골 해변 미군 함포 사격 사건. 반격의 불씨를 마련하고 전쟁의 판도를 바꾼 형산강 전투 등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에 호국 문화의 길을 더 확대 조성하여야 합니다.
이제 곧 호국보훈의 달이 다가옵니다. 조국과 포항을 지키기 위해 포항 이곳, 저곳 능선 골짜기에서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잊혀지지 않고 올바르게 후손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포항시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주시기를 주문드리며, 이상으로 본의원의 5분 자유발언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