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청렴·지조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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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청렴·지조 기린다
  • 이진두
  • 승인 2009.03.08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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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의당을 지키는 가암(佳巖) 최채량(崔埰亮) 선생

- “내 비록 늙었어도 목숨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이야 못하겠소?”-
이 말은 조선 선조~인조 임금때의 무신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장군(1568~1636)이 남긴 말이다. 정무공은 경주에서 태어나 1592년 임진왜란때 25세에 동생 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때 결사대 수백명을 인솔하고 서생포의 적을 격멸한데 이어 양호·권율장군과 함께 도산에서 대승했다. 1600년 여도만호겸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1607년 오위도총부 도사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갔다.
가덕진 수군 첨절제사 경흥부사 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 경기수사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였다. 1634년 전라수사를 거쳐 1636년 공주영장으로 병자호란을 맞자 감사 정세규와 함께 전장에 나갔다. 이때 정무공의 나이 69세였다. 감사 정세규가 엄동설한에 노장군을 전선에 나가게 하기가 민망하여 군대편성에서 제외시키려 하자 정무공이 한 말이 바로 이 말 “ 내비록 늙었어도 목숨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이야 못하겠소?”였다. 그는 결연한 자세로 전장에 나아가 용인의 험천(지금의 탄천)에서 청군을 만나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647년에 청백리가 되었다.
숙종임금은 경주의 향리에 있는 사당에 숭열사우(崇烈祠宇)라는 사액을 하사하였고 숭열사우는 경주 선비들의 요망으로 용산서원(龍山書院)이 되어 제향하고 있다.

- 경주 내남면 이조3리에는 충의당이 있다.
충의당(忠義堂)은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살던 곳이다. 처음에는 흠흠당으로 불리었으나 1760년경 중수한 후 충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흠흠당이라 이름지어진 것은 염근서흠(廉謹叙欽:청렴하고 삼감을 흠모한다)과 경절예흠(勁節예欽:꿋꿋하고 굴하지 않는 지조를 흠모하다)에서 나온 말로 정무공의 청렴과 지조를 흠모하는 뜻으로 인조임금이 친필로 내려준데서 유래한다.
지금도 이 곳엔 유물 200여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잘 보존되고 있으며 정무공의 충절을 기려 찾는 이들이 많다.

최재량 선생



- 충의당을 지키고 보존하는 후손 가암(佳巖) 최채량(崔埰亮) 선생(77).
“저희 후손들이 이 터에서 몇 백년을 살아왔습니다. 정무공 어른 이후로는 벼슬을 한 어른이 안계십니다. 벼슬 탐내지 않고 욕심없이 살았기에 오늘까지 끈끈하게 이어져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와같이 살면서 자손의 도리를 다하고 집을 지키며 조상의 삶을 본받아 사는 것이 후손으로서의 긍지와 책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암 선생은 희수의 나이를 잊게 하듯 맑고 정정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선생은 교직에 오래 근무하다 정년퇴임 얼마 남기지 않고 향리에 내려왔다. 선생의 부모님께서 연로하셔서 충의당을 지키는 일은 선생이 퇴직 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은 “내 자식도 이 근처로 오라 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 집 지키는 일도 배우라고 했습니다. 내 죽고 나면 이 집을 지켜야지요” 한다.


- 종의 비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다.
충의당에는 충노 옥동 기별 불망비(忠奴 玉洞 奇別 不忘碑)가 있다. 충성스런 종 옥동과 기별을 기리는 비다. 가암 선생이 여기 와서 두 종의 사적(史籍)을 간추려 비문을 짓고 비를 세웠다.
옥동과 기별은 정무공을 모시고 전장에 나가 그를 그림자처럼 따랐으며 “주인이 충신인데 어찌 충노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싸우다 장렬히 순사(殉死)하니 시신이 장군의 곁에 있었다고 한다.
정무공의 후손들은 이 두 종을 기려 정무공의 사당에 그들의 신위(神位)를 모셔두고 제향을 받들 때 그들에게 절을 올렸다. 가암선생은 “이를두고 일부 선비들은 양반이 어찌 종의 제사를 지내며 종에게 절을 할 수 있느냐고들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신분이 종이기는 했으나 나라에 충성하고 주인에게 충성한 사람입니다. 그 충성을 기리는데 어찌 신분을 따지겠습니까”라며 두 종을 기리는 뜻을 밝힌다.
신분제도가 엄격하던 조선사회에서 양반이 종의 제사를 지내고 게다가 절까지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무공 후손들은 그러지 않았다.

“집안의 잡다한 일을 맡아 하고 농사를 짓고 하는게 모두 이들 하인과 종들이었지 않습니까, 그들이 없었다면 농사는 누가 짓고 집안 일은 누가 합니까. 양반이라고 거들먹거리기에 앞서 이들 아랫사람의 노고를 이해하고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야말로 선비들이 지녀야 할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가암선생은 조상들의 그러한 마음을 이어받아 손수 그 두 종을 기리는 글을 짓고 비를 세운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조선시대의 신분제도가 한갓 지나간 역사로만 알고 있지만 그런 사회에서도 주종을 떠나 끈끈한 인간관계를 견지한 정무공 집안의 이런 일은 깊이 새길일이요 귀감이 아닐 수 없다.

- 청렴하고 삼가고 굿굿하게 살아간다.
가암선생은 조상이신 정무공이 보여준 청렴결백과 굿굿하고 곧은 지조 즉 염근경절의 삶을 가훈 삼고 이를 자랑하며 그렇게 살아가기를 다짐하고 있다. 아울러 선생은 나만이 아니라 여러사람들이 이 ‘염근경절’의 정신을 깊이 새기고 실천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한다. “이 정신이야말로 우리 집안사람들만이 조상을 기리고 칭송하는 뜻으로 지니고 살아가라는게 아니라고 봅니다, 어느 시대든 우리네 삶의 근간이 되어야 하는 정신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한다.
시절이 혼란스러울수록 삶이 고달프고 힘들수록 사람사람들이 지니고 실천할 정신은 올곧아야 한다. 염근경절이야말로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하지 않겠나나는 생각이다.

최진립장군이 직접 세운 나무

- 조상의 뜻을 받들어 지녀나간다는 일은 힘듭니다. 그러나 그 보람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가암선생은 조상의 뜻을 받들고 그 정신을 이어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선생은 “조상께서 머물던 집을 지키고 가꾸며 보존하고 그 뜻을 제대로 이어간다는 일은 후손으로서 여간 큰 보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람과 고난은 함께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집을 지키고 가꾸는 일 또한 그러합니다. 이 집을 보존하는 일도 문중에서 도움을 주고 뜻 있는 어른들이 도와주시는 덕분입니다. 제가 힘을 보탠 것이라고는 다행이 제게는 연금이 있고 하니 그럭저럭 꾸려나가고 있습니다”라면서 저간의 사정을 일러준다. 선생은 이 집 충의당을 지키면서 주변 경관을 단장하고 당우(堂宇:집채)를 손보는 일등을 도맡아 해 오고 있다. 고가(古家)라서 손 볼 일도 잦은 편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그런저런 일을 후손으로서 해야 할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요 보람 큰 일이라고 한다.

-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유붕원방래(有朋遠方來)
학이시습지요 유붕원방래라. 배우고 때로 익힘이요 벗이 먼데서 찾아오니····. 이 말은 공자님 말씀이다. 가암선생은 당신의 서재로 들어가는 대문 양쪽에 이 글을 써서 붙여 놓고 있다. 학자가 공부하는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문에 써 놓은 이 글을 보면서 이 집 주인의 풍도를 느끼게 된다.
“학문을 배우고 익히고 벗이 오면 함께 즐기고···. 이런 삶이 행복하지 않습니까. 서로 웃고 격려하고 그래서 건강하게 지내면 얼마나 좋습니까.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고 알아주든 말든 내 멋을 지니고 살면서 나름대로 깨끗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가암 선생의 이 말은 당신의 소회이기보다 후학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으로 깊이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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